‘정인이’ 사망, 개신교는 책임 없나

(pxhere.com, CC 0)

새해 첫주, [ 16개월만에 양부모의 학대로 ] 세상을 떠나야 했던 ‘정인이’의 사망이 온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국민들이 [ 국민청원을 통해 23만명의 동의를 얻어 ]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고, [ 국회의원들도 뒤늦게 수십여 개의 추가 법안을 제출하며 ] 국민들에게 일한다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고 있다.

문제는 이 아동의 사망에 가담한 양모와 양부가 전형적인 개신교인이라는데 있다. [ 평화나무의 보도 ]에 따르면 양부모는 이른바 특정 지역의 ‘PK’로서 태어나 하나님을 수식어로 부르는 동일 지역의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특정 개신교 언론에서 일하는 등 예수믿는 사람으로서는 바랄 바 없는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났다. 특히 양부모는 [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국내입양을 하였는데 ], [ ‘입양을 위해 기도를 했다’라며 ] 관계자들에게는 안심을 시켰지만, 실제로는 친딸을 위해 여동생을 선물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보여주기 힘든 폭력과 폭행을 보였다. 다만 이들의 모습이 단순히 ‘일부의 일탈’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회는 어린아이를 신앙적으로 양육해야 한다며 체벌이나 강제적 조치를 옹호하고, 신도들의 일상생활을 교회 기반, 순종 기반으로 구축해 왔다. 그 사이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가장 갖춰야 할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만 교회와는 연을 끊은 가나안 신자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다음세대’는 교회를 벗어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인의 사망을 추모하며, 폭력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한국 개신교가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하거나 무시해도 되는 것인지, 조용히 주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논평] 한국 개신교의 무능, 언제까지 가나

9일 S고 학생들이 인천 부평문화의거리에서 피케팅을 진행하고 있다. (저자 촬영)

낯선 풍경이었다. 고등학생들이 자기 학교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거리로 나서는 것 자체도 드문 일이거니와, 학교 소재지와 거리가 있는 곳에, 무작정 학교 교복을 입고 나와서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학교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청하는 것은.

그런 풍경이 벌어진 이유는 이 학교의 교장과 교감이 학생들에게 강요한 각종 부조리였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공연을 자신의 돈으로 다닐 것을 요요구면서, 자신들의 비리에는 눈을 감았다. 여학생들을 의도적으로, 그들의 의사와 상관 없이 군부대나 남고로 보내서 선정적인 춤을 추며 요깃거리로 삼게 만들었다. 그리고 받은 출연료는 자신들의 몫으로 뗴었다. 이런저런 학교의 비리에 학생들이 저항하자 올해 개학부터는 반대하는 선생들을 자르고 아예 선생을 배정하지 않았다. 수업은 파행으로 치달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궁금하지만, 여기까지는 그나마 괜찮다고 하자.

그런데 내가 저들을 보면서 더더욱 부끄러운 것이 있다. 바로 해당 고등학교가 복음을 전하겠다면서 미션스쿨임을 자랑스럽게 홍보했던 학교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겠다며 매주 채플을 드린다. 교장이〈빈방 있습니까〉를 공연했다며 자랑스럽게 문화선교를 내세운다. 그런 겉이 좋으면 뭐하나! 복음의 본질이 없는 곳이라면 그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더 큰 S고의 문제는 갑작스럽게 튀어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 있다. 한국교회 전반에서 제목만 다르지 동일한 레퍼토리로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다. 이런 문제가 나타난지도 꽤 됐다. 한국사회에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있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저지른 박인근이라는 자도 복지원에 교회라는 것을 짓고 매일 예배를 드렸다. 이유없이 납치당한 채 고된 폭력과 노역에 시달리던 사람들의 희생을 박인근씨가 조장했고, 그들 사이에서 죽어나간 생명이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전두환씨의 사회 정책에 의해 칭찬받았고, 폭력의 피해자들은 87년 6월 민주항쟁이 끝날 때쯤에야 그 지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웃긴 것은 박인환씨가 그 이후에도 시설을 운영하면서 돈을 벌다가 편안하게 눈을 감았고, 지금도 복지원 경험자들은 최하층에서 파괴된삶을 살고 있다. 폭력과 피를 저지른 사람은 편히 가다 죽고, 그들을 대신해 국가가 사과했는데 그들과 한 부류였을 한국교회는 형제복지원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시편 73편의 아삽의 절망적인 고백(:2-15)이 떠오르게 만드는 작자다.

이뿐만이겠는가? 4·3 민중항쟁에서 믿는 자의 이름으로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단, 한국교회 목회자들에 의한 각종 성추행, 재정비리, 범죄…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하셔도 뭐라고 할 것 없는 죄들을 우리는 그냥 모르는 체 하면서 넘겨왔다. 아니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넘겨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교회안에서는 아직까지도 반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를 가장한 가짜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전도만 하면 미련한 말을 사용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대처능력(?)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천지나 구원파보다도 못할지도 모르겠다. 이건 한국교회 전반의 무능에 가깝다.

이미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타종교의식이 철저하지 않은 이상 교회를 한 번 씩은 거쳤다. 또한 주변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을 굳혔다. 한국교회가 앞으로 저들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엔드타임 속에서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바뀌어야 할텐데,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모르겠고, 바뀌고 싶지 않아하는 교회 공동체들 속에서 무엇인가를 외치려는 시도도 이제는 빛도, 영향력도 잃어가고 있다.

그 결과, 이대로 한국 교회는 소수자로 전락하고 말까? 그래서 엔드타임에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교회가 될까?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와 많은 이들을 위해 죽으신 구원의 값을 헛되이 하지 않기 바란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 자리에서부터 한국교회의 잘못을 안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마침 사순절 시기라서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