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극우’는 폭력 면허가 아니다

극우 사이트인 일간베스트에 문재인 대통령을 죽이려고 총기를 구매했다는 글이 3일 올라온 이후 주목이 확산되며 기사화되자 해당 글이 삭제되었다. 이에 서울 강북경찰서가 7일 해당 글을 올린 사람의 접속기록을 일간베스트로부터 넘겨받아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통령 경호처를 두며 대통령의 안위에 신경을 써온 우리나라의 특성 상, 당연히 장난이더라도 대통령 살해 의도가 공개적으로 드러나면 이를 추적하고 처벌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해당 보고가 이뤄진 다음 날인 8일, 한 건의 기사가 국내 유수언론인 동아일보에 올라왔다. 기사에 따르면 이번 사태에 반발한 일베 정게 회원들이 일베 게시판에 ‘말만 해도 잡아가냐’며 적기도 힘든 다양한 방법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했다는 글을 다수 올렸다고 한다. 이 기사의 마지막 문단에는 ‘”이것도 경찰이 나서는지 한번 두고 보자”‘라는 엄포도 자리했다. 대한민국의 주요언론이 이런 식의 기사를 내보내도 되는지 의아하다.

각종 긴급명령이 국민을 옭아매던 군사독재시대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런 식의 반응을 극우세력이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의 폭력을 가하더라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경험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경험칙이 생겨난 이유는 대한민국 창립 이후 계속해서 그런 경험이 극우세력의 몸에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4 · 3항쟁에서 양민 학살을 진행한 서북청년단은 한 번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수많은 계엄군들이 5·18 민주항쟁을 포함해 다양한 장소에서 민간인 살인을 저질렀으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포상뿐이었다. 실미도에서 사람들을 꾀어서 죽음의 훈련으로 내몬 사람들도 어떠한 처벌을 받지 않았고,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과 희망원을 운영한 대구대교구 대주교들과 원장신부들은 원내에서 이뤄진 살인의 책임을 하나도 지지 않았다.

이러한 원칙은 현재 이뤄지는 시위에도 적용된다. 적극적인 민주세력 중에서는 진보측이 조금만 잘못해도 곧바로 경찰이 강력하게 진압하는 반면, 보수 세력의 집회 위반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크다. 예를 들어 박근혜 시절에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삼성의 돈을 받아 ‘폭식투쟁’을 진행한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은 반면, 2015년 11월 진행된 1차 민중총궐기에서 경찰은 지침을 위반하고 고압력의 물대포를 분사하여 백남기 농민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며, 정확한 진상규명과 처벌에는 1년을 기다려야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이런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예를 들어 5월 25일 광화문광장 중부에서 진행된 5·25 범국민촛불문화제 개최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한국당에서 방해소음을 틀어댔지만 경찰이 개입하지 않았다. 국민이 권력을 가진 ‘나라다운 나라’ 대한민국에서 이런 ‘경험칙’이 아직까지도 청산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강조했듯이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뤄져야 한다. 그 시작이 이번 사태에 대한 강력한 대처가 돼야 한다. 이명박근혜 정부 때 대통령에 대한 비판 활동을 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진보 논객과 활동가들이 국정원 사조직과 싸우게 만든 정부 요원이 처벌받았다. 이번 사건은 그 때보다도 더욱 심각한 사태이므로 범인을 검거하고, 행위를 처벌해야 한다. 우파 소속 회원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던 일종의 ‘폭력 면허’를 즉각 말소해야 한다.

특히 이번의 조롱에 대해 패러디를 올려 연대의 뜻을 나타낸 각각의 일베 회원들에게 강력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 경찰은 모든 회원의 강제 ‘경찰서 정모’를 실행하여, 모든 일베 회원들 헌법질서를 훼손하는 어떤 행위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깨우칠 수 있도록 처벌해야 한다. 이들이 처벌받을 때,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며, 결과가 정의로운 나라다운 나라’의 실현이 가까워질 것이다. (끝)

[논평] 한국 개신교의 무능, 언제까지 가나

9일 S고 학생들이 인천 부평문화의거리에서 피케팅을 진행하고 있다. (저자 촬영)

낯선 풍경이었다. 고등학생들이 자기 학교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거리로 나서는 것 자체도 드문 일이거니와, 학교 소재지와 거리가 있는 곳에, 무작정 학교 교복을 입고 나와서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학교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청하는 것은.

그런 풍경이 벌어진 이유는 이 학교의 교장과 교감이 학생들에게 강요한 각종 부조리였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공연을 자신의 돈으로 다닐 것을 요요구면서, 자신들의 비리에는 눈을 감았다. 여학생들을 의도적으로, 그들의 의사와 상관 없이 군부대나 남고로 보내서 선정적인 춤을 추며 요깃거리로 삼게 만들었다. 그리고 받은 출연료는 자신들의 몫으로 뗴었다. 이런저런 학교의 비리에 학생들이 저항하자 올해 개학부터는 반대하는 선생들을 자르고 아예 선생을 배정하지 않았다. 수업은 파행으로 치달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궁금하지만, 여기까지는 그나마 괜찮다고 하자.

그런데 내가 저들을 보면서 더더욱 부끄러운 것이 있다. 바로 해당 고등학교가 복음을 전하겠다면서 미션스쿨임을 자랑스럽게 홍보했던 학교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겠다며 매주 채플을 드린다. 교장이〈빈방 있습니까〉를 공연했다며 자랑스럽게 문화선교를 내세운다. 그런 겉이 좋으면 뭐하나! 복음의 본질이 없는 곳이라면 그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더 큰 S고의 문제는 갑작스럽게 튀어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 있다. 한국교회 전반에서 제목만 다르지 동일한 레퍼토리로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다. 이런 문제가 나타난지도 꽤 됐다. 한국사회에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있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저지른 박인근이라는 자도 복지원에 교회라는 것을 짓고 매일 예배를 드렸다. 이유없이 납치당한 채 고된 폭력과 노역에 시달리던 사람들의 희생을 박인근씨가 조장했고, 그들 사이에서 죽어나간 생명이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전두환씨의 사회 정책에 의해 칭찬받았고, 폭력의 피해자들은 87년 6월 민주항쟁이 끝날 때쯤에야 그 지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웃긴 것은 박인환씨가 그 이후에도 시설을 운영하면서 돈을 벌다가 편안하게 눈을 감았고, 지금도 복지원 경험자들은 최하층에서 파괴된삶을 살고 있다. 폭력과 피를 저지른 사람은 편히 가다 죽고, 그들을 대신해 국가가 사과했는데 그들과 한 부류였을 한국교회는 형제복지원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시편 73편의 아삽의 절망적인 고백(:2-15)이 떠오르게 만드는 작자다.

이뿐만이겠는가? 4·3 민중항쟁에서 믿는 자의 이름으로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단, 한국교회 목회자들에 의한 각종 성추행, 재정비리, 범죄…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하셔도 뭐라고 할 것 없는 죄들을 우리는 그냥 모르는 체 하면서 넘겨왔다. 아니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넘겨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교회안에서는 아직까지도 반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를 가장한 가짜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전도만 하면 미련한 말을 사용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대처능력(?)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천지나 구원파보다도 못할지도 모르겠다. 이건 한국교회 전반의 무능에 가깝다.

이미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타종교의식이 철저하지 않은 이상 교회를 한 번 씩은 거쳤다. 또한 주변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을 굳혔다. 한국교회가 앞으로 저들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엔드타임 속에서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바뀌어야 할텐데,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모르겠고, 바뀌고 싶지 않아하는 교회 공동체들 속에서 무엇인가를 외치려는 시도도 이제는 빛도, 영향력도 잃어가고 있다.

그 결과, 이대로 한국 교회는 소수자로 전락하고 말까? 그래서 엔드타임에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교회가 될까?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와 많은 이들을 위해 죽으신 구원의 값을 헛되이 하지 않기 바란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 자리에서부터 한국교회의 잘못을 안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마침 사순절 시기라서 더욱 그렇다.